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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단상. 문트레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제품을 만들 때 재료 물성이 지닌 가치와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디자인하려고 한다. 장식적인 기교는 덜게 되고 심플하고 담백한 형태로 재현되는 편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하지만 자칫 밋밋해보이고 지루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사용하면서 흥미로운 요소; 터치감, 의외의 면모, 색다른 변주 등을 가미할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문트레이는 황동 디스크의 은은한 골드빛과 디스크를 회전시켜 달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재현한 것이 특징이다. 
브라스의 과하지 않은 샴페인 골드빛이 광택감 없는 흑색과 만나 밤하늘에 떠있는 달빛과 그 정취를 전한다. 
자연을 닮은 사물을 일상에 두고 즐기고 때로는 우리의 눈을 돌려 잠시 자연 풍경에 머물게 한다면 삶 혹은 행복이 멀리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둥근 보름달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지향하는 극치의 행복이요 만복의 상태를 표상한다. 
이제 곧 다가오는 한가위, 중추의 명월은 특히 풍요의 발현이며 기복의 대상이었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중추절은 달에 제사를 지내거나 달을 감상하는 행사였으며 
이는 일본에도 전해져 ‘쓰키미(月見)’라는 달 보기 행사로 이어졌다.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시대까지 달의 아름다움을 보며 시를 짓는 문화가 성행했다. 
하이쿠 소재로 달은 자주 등장하지만 명월을 읊은 시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정월 대보름의 달맞이 행사를 하며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고 소원을 빌었다. 강강술래와 같은 원진무(圓陣舞)는 달의 재생과 죽음을 극복하는 영생을 재현한 것이다.
 
달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어두운 곳까지 두루 비춘다. 이런 특성을 불교는 진리의 보편성과 연관지었다. 
일본의 고대시가 만엽집에는 “세상에 무상의 이치를 알게 하기 위해 달은 찼다 이저렸다 하는 것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달을 통치자의 지혜와 은혜로 비유했다. 
임금을 미인에 빗대어 사계절 내내 흠모하는 마음을 적은 송강의 사미인곡에서 달은 “누각 위에 걸어두고 온 세상 다 비추어, 깊은 산골에도 대낮같이 만드는” 군주의 은혜로 묘사되었다.
 
이처럼 달은 관념적인 진리, 불생, 풍요의 상징물이기도 했지만 퓽류, 애수, 애상을 증폭시키는 정서적 매개체이기도 했다. 
당나라 시대 시인 이태백은 달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월하독주) 달과 그림자와 벗 삼아 세사람이 술을 마신다는 풍류를 노래했다. 
반면에 사랑하는 이가 오면 춘풍 이불 아래 넣어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편다는 조선시대 여류 시인 황진이의 가사도 있다. 
일본 이세모노가타리에 수록된 와카 중에서도 “달은 옛날의 달이 아니고 봄은 그 옛날의 봄은 아닌데 이 내 몸 하나만 옛날 그대로인데,
이제 온다고 그대 말을 했기에 9월 긴 밤에 새벽달을 맞이 하네 그대는 오지않고” 라며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계절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절절한 심정을 달의 정취에 담은 시가 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달은 관찰되는 대상이거나 사물로써 연구되는 객체라기보다 관념적이며 온유하고 애상적인 정서를 유발하는 매개물이었다. 
사물의 본질 즉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특성에 천착하려는 사고의 영향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견월망지見月忘指.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는 뜻이다. 
어느 불자가 문자를 모르는 노승에게 실망하여 돌아가려하자 노승이 진리는 하늘에 있는 달과 같고 문자는 그 달을 가르치는 손과 같다고 말한 불교 경전의 이야기에서 연유한다.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 그 수단에만 몰입해서는 안되지만 그 수단들이 누적되고 계승되어 본질에 다가서는 위대한 사다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1610년 '별에서 온 메세지 Sidereus Nuncius'라는 논문이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발표되자 순식간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 출판된다. 
논문의 저자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파도바 대학의 교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이다. 
메디치 가의 후원을 입어 네덜란드에서 만든 망원경을 개량했고 본래 화가의 꿈이 있던 그는 망원경을 통해 달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논문의 삽화로 옮겼다. 
그가 그린 여러 날의 달의 모습에는 지구에서 볼법한 산, 계곡, 분화구가 있었다. 비로소 수세기 동안 추정될 뿐 확증할 수 없었던 달의 표면이 최초로 기록된 것이다.

Galileo's sketches of the moon   1610

갈릴레오 이후부터 달은 관측기구를 사용하여 볼 수 있는 관찰의 대상이 되었고 국가 단위에서 관측기구를 개량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단스크 출신의 요하네스 헤벨리우스 Johannes Hevelius1611-1687는 맥주 제조와 유통으로 쌓아온 가문의 부를 그의 천문학에 대한 열정에 투입했다. 
당시 최첨단 관측기구들을 구비한 천문대를 그의 집에서 접할 수 있었다. 최첨단 설비를 소유한 덕분에 달의 지형을 기록하는 '월면 지정학 selenography'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창시할 수 있었다.
폴란드 국왕이 그의 천문대에 여러번 방문했고 상인 출신인 그에게 귀족의 지위를 수여했다. 그리고 그 후대 왕들도 그의 천문대를 후원했다.
Map of the Moon 1647 Johannes Hevelius 
 
갈릴레오의 발견이 있기 수세기 전에 달은 물체가 아니라 아이콘이었다. 고대의 달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셀레네 여신으로 의인화되었다.
불멸의 머리와 지구 전체를 포용하는 광채를 발산하며 주로 바다에서 출현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특히 셀레네, 달의 여신은 달이 지고 차오르고 다시 지는 윤회의 양상을 현현하기 때문에 불멸성 상징한다. 
동시에 이런 달의 모습은 지상과 천국의 중간의 어떤 영역을 연상하게 한다. 기원전 7세기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는 “영혼의 실체는 달의 남겨져 있으며 특정한 삶의 흔적과 꿈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고 썼다. 
달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미지의 영역, 영혼이 잠시 기거하는 곳, 주술적 힘을 지닌 대상이었다. 이런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오래도록 서구 문화권에서 발현된다. 
보름달이 뜬 밤은 지상의 이성적인 세계와 미지의 비이성적인 세계가 교차되어 광기가 증폭되는 시간대로 여겨졌다.
메리 셸리 Mary Shelley의 고딕 소설 프랑켄슈타인 속 광기에 찬 괴물이 창조주를 죽이겠노라고 예고한 날은 보름달이 뜬 밤이다. 
한편 달의 변화무쌍한 모습은 변덕스러운 마음에 비유되기도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는 영원한 사랑을 달에게 맹세하는 로미오에게 답하는 줄리엣의 입을 통해 달의 속성을 묘사한다.
“오, 달은 안돼요. 변덕스러운 달은 안돼요. 달마다 궤도를 돌면서 찼다 이울었다 하는 달처럼 당신의 사랑도 변하는 것이 아니라면.” 
 
달을 비롯하여 여러 자연현상을 신화적 접근으로 해설하려는 전통은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난다. 
불사의 약을 남편과 나누지 않고 홀로 취하여 달로 쫓겨난 중국의 항아 설화도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호기심은 논리적 수리적 물리적 접근을 통해 대상의 실체에 다가서게끔 이끈다. 
달은 육안으로도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어서 달의 흑점과 일식과 같은 현상을 통해 지구와 달의 거리 그리고 별의 움직임, 지구와 태양 그리고 달의 공전에 대해 연구하는 천문학이 발아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6세기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태동한 밀레토스 학파 Milesian School는 자연현상을 그대로 관찰하고 수학, 물리학, 기하학을 응용하여 만물의 근원을 설명하려는 학문 집단이다. 
이들의 연구방식은 서구 자연철학의 맹아가 되었으나 로마가 멸망하면서 이슬람 제국으로 가서 발아했다. 9세기 10세기 아랍의 수학, 천문학, 기하학의 눈부신 성취는 고대 그리스 사상을 수용하고 발전시켜서 이룰 수 있었다. 이 당시 중국에서도 1400여개의 별이 그려진 관측자료 천문도 '순우천문도’가 기록되었다. 이후 원나라가 이슬람 제국과 교류하면서 중국의 천문학은 더욱 발전했다. 

순우천문도 1247

반면에 서구 기독교 중심의 유럽은 종교의 신념적 세계관에 몰입되어 있었다. 12세기 아랍의 천문학이 번역되기 전까지 유럽의 달은 철저히 종교적 세계관에 의해 해석되고 교리를 위해 헌신당하는 대상이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따르면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별의 관을 썻더라.이 여자가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이며 마리아가 등장하는 발 아래는 으레 달이 그려졌다. 6세기 그레고리 교황이 말하기를 달은 지상에 모든 타락하고 변덕스러운 것을 상징한다.
태양과 달은 선과 악, 선과 타락, 신성함과 속됨, 블멸과 필멸을 상징한다. 중세시대에는 문맹인 대중에게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그림을 사용하였고 달은 마리아의 발 아래 있는 것이었다. 
물론 달의 움직임은 면밀히 관찰되었다. 주요한 성일인 부활절을 계산하고 작물을 제때 제배하기 위해 행성간 궤도와 별자리, 달과 해의 움직임을 담은 천문도를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도에는 오차가 있었고 발견되는 자연현상을 해설해주기에는 부족했다. 기독교의 세계관에 부합된다면 오차는 용인되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의 주장은 오랫동안 침묵되어야 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비로소 유럽은 아랍의 선진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아랍 문명이 고대 그리스의 자연과학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수학, 천문학, 물리학, 기하학을 번역하여 천년전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저서가 거대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동시에 유럽이 비로소 세계무역체계에 편입되면서 유럽에 상품과 화폐, 노동, 책, 언어가 빈번하게 교환되는 도시가 탄생했다. 
그리고 도시의 탄생은 상인 계급의 부상으로 이어졌고 세속주의와 물질문명이 사회에 침투하고 안착할 수 있었다. 달 역시 교리로부터 해방되어 사물 그 자체로 관찰되고 묘사되기 시작했다. 
플랑드르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부르고뉴 공작에게 고용된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85-1441 가 그린 2패널로 이루어진 제단화, 십자가 처형과 최후의 심판 중 왼편 십자가 처형을 보자. 
골고다 언덕 위 서쪽 푸르스름한 하늘에 달이 보인다. 달은 4분의 3정도 채워져있으며 생생한 흑점과 그늘이 표현되었다. 
달로부터 눈을 돌려 화폭의 정중앙에 위치한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를 지나 주변을 둘러싼 인간 군상의 생생한 표정들; 비통, 조롱, 힐난 마주한 듯 생생하다.
질감이 느껴지는 의상 표현과 색채를 통해 화폭의 깊이감과 거리감은 관람자를 골고다 언덕 위로 데려가 단숨에 그 풍경이 시야로 들어온다. 그는 상징주의적 하늘 대신 지상의 하늘을 묘사한 것이다. 
그는 모든 작품에 “내가 할 수 있는 한Als ich Kan” 이라는 문구를 남겼는데 그가 그의 시각적 한계와 기술적 역량이 닿는 만큼 세밀하게 화폭에 담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가늠할 수 있다.
어윈 파노프스키 Erwin Panofsky 는 얀반 에이크의 눈은 현미경이자 망원경으로 작동한다 라고 평했다. 이후로 달은 서사적이고 문학적으로 묘사되기보다 인식되고 관찰되는 대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The cruciuficxion ; The Last Judgement, Jan Van Eych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얀 반 에이크 처럼 인간의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방법으로 사물을 탐구했으며 더 나아가 사물의 근원, 운동 원리, 법칙을 연구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은 과학으로 통하는 길이라고도 했다. 그는 먼 사물을 가까이 볼 수 있는 렌즈에 대한 아이디어를 최초로 구상했고 달을 관측할 수 있는 망원경과 유사한 관측기구를 개발했다.

루보비코 치골리Ludovico Cigoli 1559-1613가 마조레 대성당에 그린 프레스코화 성모마리아 발 아래 달은 이전 인류가 본 달의 형상이 아니었다.
갈릴레오의 친구이며 그의 학문적 연구를 서신으로 자주 접할 수 있었던 터라 그는 울퉁불퉁한 바위 같이 달을 묘사했던 것이다. 치골리 이전의 화가들은 달을 매끈한 수정체로 묘사했던 것이다. 
The virgin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in the domed ceiling of the Pauline chapel in Rome Basilica of Santa Maria Maggiore 1610-12 Ludovico Cigoli
The Immaculate Conception 1630, Francisco de Zurbaran

이후 달에 지구와 유사한 지형들;산, 계곡, 분화구 그리고 대기권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달은 더이상 서구 유럽사회에서 신비로운 미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정복될 수 있는 토지가 되었다. 영국 해군 소속의 의사,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주치의이며 물리학자, 영국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 1540-1603가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임을 밝혀낸 후로
지도 제작은 더욱 정교해졌고 달은 측량가능하고 영역을 구분지을 수 있는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인류가 정복할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1865년 프랑스의 소설가 쥘 베른 Jules Verne 발표한 작품 ‘지구에서 달까지’는 초대형 대포를 이용하여 달로 유인 우주 비행을 떠나는 내용이다. 그리고 100년 후 인류는 달에 도착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우주 탐사선으로 변모하면서 달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물체가 되었다.
2020년부터 미국 주도로 민간기업과 국가들이 협력하여 달에 지속 가능한 유인 기지를 2028년까지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하여 20개국이 가입했다. 이 프로젝트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다.
그러나 비단 달의 여신은 아르테미스 뿐일까. 옥토끼와 함께 달에 영원히 갇혀버린 항아도 있다. 
중국은 2030년전까지 달 연구기지를 건설하고 통근과 체류가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는 ‘항아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정말 가까운 미래에는 어쩌면 인구증가와 자원의 남용으로 상처가 가득한 지구를 대신할 행성이 달이 될 수도 있다. 
그때 쯤이면 달은 저 멀리 밤하늘에 떠 있어 우리가 눈으로 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영토이고 우리의 생활공간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달을 향한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정서는 사라질까? 그래도 거대한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 신비로움은 자연물의 상당부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장엄한 풍광,유한한 인간의 존재와 대비되는 수천년 수백년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존재감, 원시의 힘이 느껴지는 생명력은 수리학, 지리학, 물리학, 천문학과 같은 측량할 수 있는 인식을 넘어
경험적으로 정서적으로 주는 울림이 있다.
그래서 그림 속 달빛이 비추는 도도한 템즈강 풍광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심상과 우리의 심상 그리고 고대 인간이 느꼈을 그 심정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Reflections on the Thames Westminster 1880 John Atkinson Grimshaw